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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서의 우리음악유산답사] 백악지장(百樂之丈) 거문고를 찾아

 

백악지장(百樂之丈) 거문고를 찾아


악성(樂聖) 왕산악(王山岳)의 거문고


우리 음악을 이야기할 때 왕산악(王山岳), 우륵(于勒), 박연(朴堧)을 3대 악성(樂聖)으로 꼽는다. 이 중 왕산악은 거문고를 만든 인물이다. 《삼국사기》의 다음 이야기는 어린이들도 익히 아는 이야기다. 진(晉)나라 사람이 칠현금(七絃琴)을 고구려에 보내 와 이 악기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을 찾았으나 아무도 없자, 왕산악이 이 칠현금을 개량하여 새로운 악기로 만들고 100여 곡을 지어 연주하였다. 이 소리를 듣고, 검은 학이 날아와 춤을 추어 이 악기를 현학금(玄鶴琴)이라 하였고, 이후에는 현금(玄琴), 거문고라고 불렀다. 

 

고구려 무용총의 거문고

 

거문고는 ‘검은(玄) 고’이며 ‘검은’은 고구려를 뜻하는 ‘ᄀᆞᆷ’과 현악기를 뜻하는 ‘고’의 합성어라는 의견이 가장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진다. 일본에 전해진 고구려 음악을 고마가쿠(ごまがく:高麗樂)라고 하는데 이 고마(ごま)도 고구려의 옛 명칭의 발음과 관련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전(現傳)하는 고구려시대의 거문고 유물은 없지만, 중국 북동부와 북한 지역의 고분벽화에 그 흔적이 남아있어 그 오랜 역사를 확인할 수 있다.

 

왕산악이 어느 시대 사람인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는 없으나 《삼국사기》에 따르면 위진남북조시대 진(晉:265~420년)에서 들어온 현학금을 개량하였다니 그즈음의 사람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 하지만 김부식이 기록하던 당시는 중국에서부터 온 문물을 더 좋은 것으로 알아주는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에 중국 악기를 고쳐 만든 것이라고 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조선시대 역사서(歷史書)인 《동국통감》에는 양원왕 8년(552년)에 거문고를 만든 것으로 기록돼 있기도 하지만, 5세기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용총에 거문고를 연주하는 고분벽화가 있는 것으로 보아 그보다는 이전 사람일 것이다.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백결선생 떡방아’

 

‘아름다운 이 땅에 금수강산에 단군 할아버지가 터 잡으시고’로 시작하는 노래방에서도 불리는 어린아이들이 좋아하는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이란 익숙한 노래가 있다. 100명의 선정은 작사자의 판단에서 비롯되었기에 노랫말에 나온 분이 위인인지 아닌지는 각자의 몫에 맡기겠지만, 가사 중에 ‘백결선생의 떡방아’라는 내용이 있다. 이 노래에 나올 만큼 유명 위인인 백결선생(百結先生)은 누굴까? 《삼국사기》 악지에는 자비왕(慈悲王:신라 20대 왕) 때 인물로 다음같이 묘사돼 있다. 집안이 매우 가난해 옷을 백 번씩 기워 입어 백결선생이라 불린 청렴한 음악가, 그는 즐거움, 노여움, 슬픔, 기쁨, 불평을 모두 금(琴)으로 표현할 정도로 연주 실력이 뛰어났다. 연말이라 이웃들이 곡식을 방아로 찧으며 음식을 준비하자, 그의 아내가 배고픔을 못 참고 그 방아 찧는 소리를 부러워하자, 그는 금(琴)으로 방아 찧는 소리를 연주하며 아내를 위로했다고 한다. 그 음악이 세상에 알려졌는데 이를 대악(碓樂)이라 했다.

 

그런데, 백결선생이 연주한 이 금(琴)을 거문고로 해석한 자료를 주위에서 흔하게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만일 백결선생이 연주한 악기가 거문고였다면 《삼국사기》에 왕산악의 거문고를 현금(玄琴)이라기록한 김부식이 그 악기를 금(琴)이라고 기록했을 리가 없다. 삼국지 위서동이전(魏書東夷傳)에는 변한, 진한에는 슬(瑟)이라는 악기가 모양이 축(筑)을 닮았다는 기록이 있고, 광주 신창동 삼한시대 저습지 유적에서 출토된 고대 현악기와 대전 월평동에서 양이두(羊耳頭)가 발견된 것 등등을 보았을 때 고대 한반도에는 이미 현악기가 있었다. 백결선생이 연주한 금(琴)은 아마도 가야금, 거문고 이전에 연주되던 고대 한반도의 현악기였을 것이다.
 
거문고의 씨앗을 통일신라 땅에 뿌린 옥보고(玉寶高) : 남원은 거문고의 고장

 

고구려 땅도 아닌 남원이 거문고의 고장이라니 의아할 것이다. 판소리 춘향가의 배경이 되는 남원에는 유네스코에 등재된 판소리를 기념하며 세워진 ‘국악의 성지’라는 박물관이 있다. 이 국악의 성지에는 이곳 출신의 여러 동편제 판소리 명창의 묘역(墓域)이 조성되어 있는데, 그 맨 꼭대기에는 악성옥보고선생(樂聖玉寶高先生)의 묘(墓)라는 묘비와 함께 그의 봉분(封墳)이 만들어져 남원 땅에 옥보고가 존재했음을 증거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름도 거창한 이 국악의 성지 박물관에는 판소리에 대해서만 전시하고 있지 옥보고에 대한 내용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저 옥보고의 묘역만 그럴듯하게 만들어 놓았을 뿐이었다.

 

옥보고 선생의 묘

 

《삼국사기》에는 통일신라 경덕왕(742-764) 시기에 활약했던 거문고 대가인 육두품 출신 옥보고(玉寶高)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지리산의 운상원(雲上院:국악의 성지 뒷산 운봉으로 추정)에 들어가서 50년 동안 거문고를 배우고 익혀 거문고 연주곡 30곡을 지었다 한다. 옥보고가 육두품 출신으로 쓰여진 내용을 보고 그를 신라인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옥보고의 옥(玉)씨는 고구려의 성씨이다. 고구려 유민들이 남원에 자리를 잡게 된 배경인 고구려부흥운동(高句麗復興運動)에서 그 관련성을 찾아볼 필요가 있다.

 

고구려가 멸망하자 신라와 당의 갈등은 본격화되었고 결국 나당전쟁(羅唐戰爭)이 일어난다. 이 즈음 평양을 중심으로 봉기했던 고구려부흥운동은 신라의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이 봉기가 실패로 끝나자, 고구려부흥군(高句麗復興軍)은 신라에 투항한다. 문무왕은 고구려부흥운동을 이끈 안승(安勝)과 고구려 유민들을 금마저(金馬渚:지금의 익산)로 옮겨 살게 하고 신라의 속국으로 보덕국(報德國)을 세워주며 안승을 왕으로 봉한다.

 

이후 신문왕 때에 안승을 불러 소판(蘇判)이란 관등과 김씨 성(姓)을 부여하고 재물도 주며 수도인 경주에 거주하게 한다. 이에 불만을 품은 보덕국의 고구려장수가 난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한 신문왕은 보덕국을 해체하고 유민을 남원 소경으로 이주시킨다. 옥보고 집안도 이 무렵에 남원에 정착하고 신라에 귀화하여 사찬(沙飡)이란 관등을 받아 육두품 귀족이 된 것으로 보인다.

 

옥보고의 음악은 속명득(續命得)에게 전해지고, 속명득의 음악은 귀금선생(貴金先生)에게 전해진다. 그런데 이 귀금선생이 지리산에 들어가 나오지 않자, 헌강왕(憲康王:신라47대 왕)은 금도(琴道)가 전해지지 않을까 두려워 이찬(伊飡:신라 진골이 오를 수 있는 등급) 윤흥(允興)을 남원 공사로 임명하여 거문고를 전수하도록 명하니, 윤흥은 총명한 안장(安長), 청장(淸長) 두 사람을 뽑아 귀금선생에게 보내 거문고를 배우게 한다. 그러나 귀금선생이 거문고의 기술 가운데 미묘한 것은 숨기고 가르쳐주지 않자, 진골 귀족임에도 윤흥은 아내와 함께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술과 잔을 받들어 예와 성의를 다해 가르쳐 줄 것을 청한다. 이런 정성이 있은 뒤에야 귀금선생이 표풍(飄風) 등 3곡을 전수(傳受) 해 주었다.

 

헌강왕이 금도가 끊길까 걱정한 것으로 보아, 이 시기까지는 통일신라에 거문고가 널리 보급되지는 못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국가적 차원의 노력을 기울인 끝에 신라 땅에 거문고의 전통이 뿌리내리게 되었다. 우린 이렇게 우리 음악을 소중히 여겨 온 조상들의 지혜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공자가 사랑한 금(琴), 조선 선비가 사랑한 거문고(玄琴)

 

고려 귀족들이 사랑한 악기가 가야금이었다면 조선시대 선비들이 사랑한 악기는 단연코 거문고이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따르던 이데아의 중심은 바로 공자의 가르침이었다. 공자는 음악에 대한 조예도 아주 깊은 사람이었다. 그의 음악에 대한 사랑은 남달라 장례식에 참여한 날을 빼고는 노래를 부르지 않는 날이 없었다고 전해진다. 뿐만 아니라 그때그때의 심정을 금(琴)이란 악기로 즉흥적으로 표현할 만큼 작곡(作曲)에도 뛰어난 재주를 보였다 한다.

 

그가 시경(時經)의 악곡 305편을 악기로 반주하며 노래로 불렀던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공자가 사양자(師襄子)에게 금(琴)을 배울 때 만족할 정도로 악이 완성되기 전에는 다음으로 나아가지 않고 학습에 전념하던 치열한 모습이 소개되어 있기도 하다. 음악에 대한 그의 사랑은 ‘개인의 수양은 시(詩)에서 시작하고(興于時), 예(禮)에서 세워지며(立于禮), 악(樂)에서 완성된다(成于樂)’라고 한 그의 명언에 잘 나타난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그의 가르침을 좇아 거문고를 통해 자기 수양에 매진했다. 

 

공자가 세우고 싶어 한 나라는 예(禮)가 바로 선 나라였다. 패권자의 무력 앞에 국가의 흥망성쇄(興亡盛衰)가 빈번하던 춘추전국시대에 국가의 기틀을 바로 다지는 길은 왕을 정점으로 순응하는 수직적 사회시스템을 만드는 것에 있다고 본 것이다. 공자의 제자 자유(子遊)는 ‘군자가 예악(禮樂)을 배우면 능히 백성을 사랑하고, 서민이 예악을 배우면 윗사람의 지시를 잘 따른다.’라는 스승의 말을 전했는데, 이 말의 행간에서 공자의 그런 의중을 예측해 볼 수 있다.

 

보통의 평범한 우리는 화를 잘 다스리지 못하고 위아래 없이 경거망동(輕擧妄動) 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예가 사라지는 순간이 되는 것이다. 공자는 이런 마음의 불화를 없애고 평정심을 찾는 길이 음악을 통한 자기 수양에 있다고 보았다. 공자가 연주하던 2천5백년 전의 금(琴)은 조선시대 선비의 거문고(玄琴)가 되어 마음을 다스리는 수양의 도구로, 국가의 예악(禮樂)을 바로 세우고자 하는 선비정신으로 깊은 사랑을 받은 것이다.


백악지장 거문고, 박물관 하나 없는 신세...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거문고는 탁영금(濯纓琴)이다.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1464~1498)이 땔감이 될 뻔한 남의 집 오래된 문짝을 얻어와 만들었다 한다. 원래 거문고를 만드는 재료인 오동나무는 5년 이상 눈, 비 이슬을 맞히며 자연 상태에서 나무의 진액을 모두 빼내고 건조 시킨 강한 나무로 만든다. 이 모든 과정을 문짝으로 지내면서 강인하게 이겨내고 거문고로 탄생한 탁영금은 지금까지 500년 세월을 굳건히 버티고 있다.

 

탁영금(사진 출처 : 국립국악원 공식 블로그)

 

이 거문고의 주인 김일손은 수양대군의 계유정란(癸酉靖難)에 대해 비판의식을 담은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史草:왕조실록의 원고)에 적어놓았다가 무오사화(戊午士禍)에 희생된 사관(史官)이다.

 

이 탁영금은 김일손 후손이 대구국립박물관에 기탁 해 보관 중인데 마땅히 전시될 곳이 없어 박물관에 보존 처리 중이다. 필자는 박물관에 전화를 걸어 직접 보고 싶다는 의사를 타진했으나 안타깝게도 볼 수가 없었다. 속히 거문고를 테마로 한 악기 박물관이 남원처럼 악성 옥보고의 유서가 깃든 곳에 생겨서 탁영금(보물 957호), 병와금(중요민속자료 제119호), 류홍원의 양양금(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314호), 윤선도의 고산유금 등 오래된 유물들을 한자리에서 관람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크게 생겼다.

 

탐라순력도의 불타는 신당 모습

 

거문고 하면 또 병와(甁窩) 이형상(李衡祥)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는 호조좌랑(戶曹佐郎)으로 재직할 당시, 동지사(冬至使:해마다 동짓달 보내던 사신)가 청나라에 가지고 가는 세폐포(歲幣布)의 치수가 해마다 늘어나 9척이나 길어진 것을 알고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늘어난 길이만큼 끊어서 보냈다는 일화가 전해질 만큼 강직한 성품을 지닌 선비였다.

 

그가 제주목사(濟州牧使)로 15개월간 재임할 당시(1702~1703)에 제주 관내를 순력(巡歷)하며 자연, 역사, 산물, 풍속 등을 화공 김남길로 하여 41폭의 채색 그림으로 그리게 했는데 이 화첩이 그 유명한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이다. 제주목관아 전시관을 찾으면 그 화첩과 이형상 영정 등을 만날 수 있다. 그의 청렴함은 목사(牧使)의 직분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갈 때 가져간 것이 책과 한라산 고사목으로 만든 거문고 병와금(甁窩琴)뿐이었다는 일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거문고는 그의 후손이 영천시 호연정의 수장고에 보관하고 있다.

 

이형상은 다산(茶山) 부친의 스승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쫓아가서 그를 만나 보았다는 정약용(丁若鏞)은 목민심서(牧民心書)에 병와 선생을 실학의 선구자로 소개하고 있다. 철저한 실학자였던 이형상은 본인의 가치관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제주의 신당을 129채나 불태워 버리기도 하였다. 이에 무속인들은 ‘이형상이 뱀신을 죽인 화(禍)를 받아 그 자신이 죽을 위험에 처해 제주도를 간신히 탈출하지만, 고향에 도착하니 그 아들이 대신 죽어 있더라’라는 설화를 만들어 내고, 그들의 노래인 <당본풀이>에 그 이야기를 담아 분풀이하고 있다. 이 또한 핍박을 기록하는 우리 음악역사(音樂歷史)의 한 장면이다. 
 
백악지장(百樂之丈) 거문고

 

거문고는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으나 모든 악기 중 어른(丈)이라는 뜻으로 백악지장(百樂之丈)이라 일컬어진다. 이런 표현에 대한 기록으로 지금까지는 1984년 발간된 장사훈(張思勳)의 『국악대사전』이 가장 이른 것인데, 아마도 장사훈 선생이 이왕직아악부원양성소(李王職雅樂部員養成所)에서 거문고를 배울 때 스승으로부터 자연스레 전해 들은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된다. 거문고는 조선왕조 500년의 주류였던 선비들이 사랑한 악기가 아니던가. 그들이 사랑한 거문고이니 백악지장(百樂之丈)이란 수식어를 받고도 남음 직하다.

 

거문고는 열여섯 개의 괘(棵) 위에 여섯 개의 줄이 놓여있는 악기이다. 왼 손가락으로 줄을 눌러 그 길이를 달리하여 음의 높낮이를 조절하고 오른손으로 술대라고 하는 한 뼘 정도의 얇은 대나무로 줄을 퉁기며 연주한다. 줄은 연주자 가까이부터 문현(文絃), 유현(遊絃), 대현(大絃), 괘상청(棵上淸), 괘하청(棵下淸), 무현(武絃)이라 이름한다.

 

줄의 이름은 역할과 모양에 따라 지어졌는데, 가장 많이 연주하므로 놀 유(遊)자를 붙인 유현, 줄이 가장 굵어 큰 대(大)자를 쓴 대현, 줄이 괘 위에 있다 하여 괘상청, 괘 아래 있는 줄은 괘하청이라 한다. 나머지 두 줄은 선비가 가까이할 것은 문(文)이라 연주자 앞의 줄을 문현(文絃), 멀리할 것은 무(武)라 하여 마지막 줄을 무현(武絃)이라 지었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필자는 중국에서 오현금(五絃琴)을 칠현금(七絃琴)으로 개량할 때 주(周)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을 숭상하는 의미로 문현(文絃)과 무현(武絃) 두 줄을 추가했다는 이야기에서 그 명칭 의미를 찾고 싶다.

 

성종(成宗)때 악학궤범(樂學軌範) 편찬을 주도한 성현(成俔)은 세종대왕(世宗大王)이 만드신 정간보(井間譜)에 거문고 연주법을 담아 합자보(合字譜)라는 악보(樂譜)를 창안하였는데, 얼마나 신박(信泊)한가 하면 ‘스승이 없거나 연주기법을 보지 않더라도 음악을 연주할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도 필자가 안상의 금합자보를 해석한 오른쪽의 표시 보면 그 연주 방법을 바로 파악할 수 있다.

‘엄세5’라고 적은 표시는 엄지(母指)로 세 번째 줄(大絃)의 5번째(五) 괘를 누르라는 뜻이고, ‘|’은 술대로 첫 번째부터 세 번째 줄까지 ‘슬기둥’ 소리 내며 긁어내리라는 표시이다. 이 신박한 표기법 덕에 수많은 거문고 악보가 만들어져 현세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필자는 중학생들 지도하는 교사로서 ‘다물’이란 이름의 국악관현악단 동아리를 운영하고 있다. 학생들이 배우는 모든 악기를 함께 배우겠다는 마음을 먹고 지난해부터 거문고를 배우고 있는데 다른 국악기에 비해서 연주를 시작해서 소리내기까지의 첫 단계가 매우 어렵다. 더욱이 손가락이 참 아프다. 엄지, 약지, 술대를 쥔 손가락 사이 등... 아니 이렇게 어려운 악기를 선비들이 배우고 연주한 것이 정말 맞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이다.

 

필자의 이런 마음과 상통하는 《고금가곡(古今歌曲)》의 시(詩)가 있어 그 시를 소개하며 글을 정리할까 한다. 시를 읽을 때 음악과 함께 하는 것도 좋을 듯하여 필자가 좋아하는 거문고 연주도 한 곡 소개하겠다. 이 곡은 북한의 국악인 김용실이 작곡한 ‘출강’이란 곡으로 90년대 남북 교류가 활발할 때 우리에게 전해졌다. 필자는 이 ‘출강’을 들을 때면 해군으로 군 복무하던 시절 ‘출항(出港)’의 장면이 떠오른다.

 

분주한 출항 5분전, 휘슬 소리, 현문을 철거하고, 홋줄을 걷어 올리고 당기는 갑판의 장면 등과 군함이 부두를 떠나서 평온한 바다를 가르던 일, 파도를 맞서 부수며 굽이쳐 나아가던 장면까지 서사가 머릿속 가득 연출되며 설렌다. 여러분들은 어떤 장면을 떠올릴지 궁금함을 품고 오늘의 이야기를 마무리 짓겠다.

 

 


'출강' 거문고 연주 감상하기
(https://youtu.be/D5CUPWyETQA?si=IFoGX_vj3ugowKW)

 

 

최은서(한성여중 교사, 국악박사)


<참고자료>
송혜진, 한국악기, 열화당, 2001
국립국악원, 한국의 악기 1. 돌베개, 2014
문주석, 한국 악기 논고, 지성인, 2013
김우진, 「옥보고의 행적과 업적 검토」, 『한국음악연구』 제31집, 2002, 381~399쪽
강경구, 「高句麗 復興運動의 新考察」, 『한국상고사학보』 제47집, 2005, 89~113쪽
이미경, 「新羅의 報德國 지배정책」, 『대구사학』, 제120집, 2015, 101~131쪽
정화, 「공자와 음악」, 『한국음악사학보』, 제28집, 2002, 29~42쪽
김해명, 「孔子의 음악생활」. 『사학』 통권101호, 2002, 54~58쪽
이소윤, 「제주도 역사 전설과 그 본풀이에 나타난 기억 서사의 형성 원리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 2021
국립국악원 공식 블로그 [보물 제957호 탁영금]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gugak1951&logNo=222412957471&parentCategoryNo=&categoryNo=194&viewDate=&isShowPopularPosts=true&from=search
영남일보 2024년5월24일 [동 추 거문고 이야기] 〈10〉탁영금(濯纓琴)
https://www.yeongnam.com/web/view.php?key=20240516010002381
제주투데이 2023년 2월21일 [제주옛썰] 이형상 제주 목사 분투기
https://www.ijejutoday.com/news/articleView.html?idxno=302111
유투브 북한의 거문고 음악. 김용실 작곡. 출강 -고보석 연주-
https://youtu.be/D5CUPWyETQA?si=IFoGX_vj3ugowK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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